행사
제15회 성소수자 인권포럼이 지난 2월 17일과 18일 양일에 걸쳐 서울 시민청에서 열렸다. 코로나19로 인해 오프라인 행사가 어려워진 뒤로는 처음으로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인권포럼이라는 점에서 뜻깊다. 17일 금요일에 배치된 연구세션에는 총 여덟 편의 성소수자 관련 연구가 발표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많은 청중이 몰리더니 오후에는 60여 명이 바스락홀을 가득 메웠다. 사회자라면 누구나 플로어 토론 시간에 질문이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을 할 테지만, 이번에는 두 번의 사회를 맡았는데도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첫 번째 시간에는 언제나 새삼스러운 성소수자 건강 관련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주승섭(고려대 보건과학과)과 이유빈(중앙대 사회및문화심리전공)의 연구는 직접 설문을 제작해 수행한 연구라는 점에서 특히 흥미로웠다. 얼마 전 통계청 등 여러 정부조직이 성소수자 관련 통계 및 정책을 수립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불수용한 일이 있었다. 성소수자의 삶이 구체적인 숫자로 파악되지 않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연구는 매우 값지다. 특히 한국(그리고 아시아)에서 최초로 수행된 트랜스젠더 코호트 연구는 방법론적으로도 여러 의미와 과제를 제시한다. 성소수자가 겪는 엄연한 차별과 이들의 정신건강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분석함에 있어서 종단연구는 보다 엄밀한 인과성을 담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건강 연구는 단지 성소수자 개인들이 우울한 존재라는 사실을 조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별로 말미암아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 그 역할이 있다는 박정은(경일대 상담심리학과)의 토론은 이러한 점을 다시금 짚으면서 깊은 울림을 주었다.
질적 연구로 구성된 두 번째 시간에도 성소수자 연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적 도전이 주된 화두였다. 조윤희(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는 온라인 익명 커뮤니티의 게시글 텍스트 분석을 통해 무성애 지향에 대한 탐색적 연구를 수행했다. 이에 토론을 맡은 고윤경(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은 “퀴어 하위문화나 커뮤니티 연구에서 관건이 되는 부분은 매체이자 공간으로서 디지털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가 아닐까 싶다면서 오늘날 한국 퀴어 하위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디지털 공간이 갖는 조건을 고려하여 자료 수집과 분석에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방법론적 논의를 본격화할 필요성을 제안했다. 케이팝 ‘여덕’에 대한 지배적인 인식과 재현을 넘어 케이팝 팬덤과 이성애규범, 페미니즘과 퀴어의 관계를 검토한 조소연(중앙대 사회학과)의 연구는 심층면접이라는 연구방법을 채택하였는데, 마찬가지로 홍보람(연구노동자)은 여덕의 경험이나 욕망에 더 잘 접근하기 위해서 어떤 다양한 방법이 모색될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적 고민을 제기했다. 개인적인 성연넷에서 성소수자 연구의 방법론적 고민을 주제로 여러 분야, 여러 연구 방법의 연구자가 구체적인 사례와 고민을 나누는 토론회를 빠른 시일 내에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치사회학적 접근을 취하는 연구들이 발표된 세 번째 시간에도 마찬가지로 방법론적이고 이론적인 쟁점들이 다각도로 논의되었다. 가령 미국 연방 의회의 동성혼 법제화 관련 표결을 분석한 반가은(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의 진행 중인 연구는 의원 개인의 지닌 소수자성과 정치적 선택의 관계를 분석함에 있어 양당제/양원제와 같은 구체적 정치 제도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어떻게 고려할 것인지 등의 이론적이고 방법론적으로 흥미로운 질문을 남겼다. 황연재(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은 사회적 소수자 집단에 대한 거리감 척도로 잘 알려진 ‘사회통합실태조사’ 자료를 활용해 한국 사회의 편견 유형 다섯 가지로 유형화하는 잠재프로파일분석을 실시하였다. 다른 소수자 집단에 비해 성소수자를 유독 배척하는 집단의 인구사회학적 요인을 분해한 이러한 연구는 한국 사회 혐오 정동의 배치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책적 제언의 초점을 분명히 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익했다. 사실 '사회통합실태조사'는 많은 언론에서 인용도 하고, 활동가와 연구자에게도 친숙한 자료다. 그러한 자료를 새로운 분석을 통해 재발굴하여 인사이트를 준다는 점에서 이 발표가 귀감이 되었다는 후기를 주변으로부터 여럿 들을 수 있었다.
성소수자 연구의 이론화 또한 개인적으로 주목하게 되는 지점이었다. 이번 연구세션에서 가장 많은 청중의 질문이 쏟아진 발표는 전원근(제주대 사회학과)·김지혜(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김성은(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공동연구로 기획된 ‘퀴어의 섬: 제주퀴어문화축제가 제기하는 퀴어생태학적 질문들’이다. ‘청정한 제주’와 ‘오염’이라는 배치에서 퀴어의 위치를 묻는 이 발표는 한편으로 퀴어와 기후정의 사이의 관계를 물으면서(같은 날 메인세션의 주제는 ‘기후정의 운동과 성소수자’였다), 오늘날 한국에서 반퀴어 혐오 정동이 절합되고 배치되는 맥락을 검토한다. 이 발표는 퀴어생태학에 관한 최근 논의를 제주에서 펼쳐지고 있는 구체적인 투쟁의 현장과 연결시키고 확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지만, 세 명의 연구자가 지닌 상이한 위치와 관점이 아직 성기게 연결되면서 아직은 질문에 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토론자의 지적에도 공감이 되었다. 이보아(서울대 지리학과)는 이러한 논의가 “퀴어한 감수성과 감각, 퀴어 미래가 또 다른 규범성이 되지 않는 길”로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애정어린 조언을 덧붙였는데, 이는 해당 발표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퀴어 연구가 하는 이론적 작업이란 무엇이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다시금 고민하게 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연구 수행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여러 발표자가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다. 참고할 만한 사례도 별로 없이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 우여곡절이 많았고, 구체적인 연구 내용에 대해 지도교수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또, 발표자들이 연구를 수행하면서 얻은 연구방법 상의 노하우를 성소수자 연구공동체에 공유하고 이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성연넷이 많은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한편, 트랜스젠더 코호트 연구가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연구재단의 기금으로 수행된 점 또한 한국의 척박한 현실을 고려하면 나름의 의미가 있겠다는 발표자는 사비를 털어 연구를 수행한 이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특히 대학원생들은 학업과 생계를 동시에 이어나가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연구 수행의 물적 기반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각 개인에게 남겨져있다는 점은 큰 아쉬움이다. IRB를 신청하고 심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성소수자에 대해 무지한 코멘트를 받아 어려움을 겪었다는 의견도 공유되었다. 이는 내가 최근 수행한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들의 기관생명윤리위원회(IRB) 갈등 경험 및 개선 방안 연구>에서도 중요하게 다룬 부분 중 하나인데, 성소수자에 대한 연구는 특히 연구자를 향한 자격 증명 요구부터 연구방법의 과도한 제약, 성소수자를 ‘단지’ 취약한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갖은 도전에 직면해있다.
무엇보다 이번 제15회 성소수자 인권포럼 연구세션에서 좋았던 건 발표자와 토론자, 청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애정과 신뢰 속에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논의와 비판을 주고받는 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연구자, 활동가, 일반 대중 등 청중을 달리 하는 다양한 토론회에서 우리는 자신이 아는 바를 뽐내면서 거들먹거리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과도하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반대로 대단히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발표와 토론이 이루어져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구성에서는 어떠한 생산적인 논의도 이루어지기 어렵고, 우리가 ‘연구공동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형성되기는 더더욱 어려울 테다. 이번 연구세션은 적절한 긴장과 비판, 상호적인 배움, 그리고 약간의 위트가 어우러져서 좋았다. “희망찬 제언도 좋지만, 결론이 좀 더 어두우면 좋겠는데요?”는 서찬석(중앙대 사회학과)의 익살스러운 제안에 별안간 패널과 청중 사이에 웃음보가 터진 때는 이러한 분위기를 상징하는 순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연구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줄 동료도, 공동체도 부족한 성소수자 연구자들에게 이러한 공간이 앞으로도 여러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 또 앞으로 성연넷은 물론 여러 자리를 빌어 연구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이런저런 기획을 만들어야겠다는 고민을 가득 안고 연구세션에 대한 후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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